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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지도】

 

광주목은 조선 연산군 11년(1505)에 폐군되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군세의 퇴폐로 이듬해 판관마저 폐지되었다. 명종 14년(1559)에는 광주의 지위를 격상시켜 방어사, 선조 6년(1573)에는 토포사를 겸하게 하였다. 동 왕 10년(1577)에는 광주부로 승격되어 관하에 구천면을 비롯하여 23개 면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선조 25년(1592)에는 광주부사가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났지만 이제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부족을 통일하고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어서 국방문제가 다시금 중요시 되었다. 그리하여 인조원년(1623) 나라에서는 광주부사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에는 총융사(總戎使)를 두고 이서(李曙)의 지휘아래 산성을 쌓도록 하여 3년 후인 인조 4년(1626)에 완공되자 주치소(州治所)도 산성안으로 옮겨졌다. 인조 8년(1630)에는 다시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한 등급 강등되었으나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한때 남한산성을 임시수도로 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 영조 26년(1750)에 다시 유수로 승격되어 남한산성의 수어사를 겸하더니 동 왕 35년(1759)에는 또다시 부윤으로 강등되었다가 정조 19년(1795) 다시금 유수로 승격되었다. 이어서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가 개혁되면서 1895년 광주군으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