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의하면 이곳을 「산은 많지만 들이 적은 관계로 진지로 사용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한강의 남쪽이 되는 이곳은 토양이 기름지고 들이 넓고, 북안은 천험(川險)하고 봉우리가 쪼개어 있고, 서남은 평평하여 광야에 임하므로 국가로서의 지세를 충분히 갖춘 곳으로 평가되었다.
이에 지금의 몽촌토성 부근의 평지에 궁궐을 짓고 목책을 세워 도성의 모습을 갖추고서 백성들을 이주 시킨 후 이곳의 이름을 하남위례성이라 하였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며 이듬해 천도하였다.
350여 년 동안 하남위례성을 도읍으로 하여 발전을 거듭하던 백제는 근초고왕(近肖古王) 25년(370)에 잠시 남평양에 도읍지를 옮겼다가 다시 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 장수왕(長壽王) 63년(475)에는 백제 개로왕과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승리하면서 60여 년간 고구려 땅이 되었었다.
백제는 성왕(聖王) 29년(551)에 나제연합군으로 6개군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2년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이곳을 빼앗아,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진흥왕 18년(557)에 지방행정 구획을 새로이 편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백제의 하남위례성을 중심으로 한 광주일대는 문무왕(文武王) 3년(663)에 한산주(漢山州), 동 8년(668)에 남한산주(南漢山州), 경덕왕 16년(757)에는 한양군이라 개칭하고 한주(漢州)에 속하게 하였으며 그 아래에 군과 현을 두고 도독(都督)이 다스리게 하였다. 아울러 이곳에는 2개의 정(停)을 두어 북방 진출의 전략적 기지로 중요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