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년(명종 18년)~1625년(인조 3년) 정엽의 자는 시회(時晦)이고 호는 수몽(守夢)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진사 정유성(鄭惟誠)의 아들이다.

정엽은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4세 때에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업하고, 성혼(成渾)․이이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유들과 교유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을 맡았다. 1587년 감찰,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 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598년에 응교, 집의로서 시강원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있을 때 동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 대사간, 예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영위사로서 관서지방에 다녀왔다. 이 무렵 척족 기자헌(奇自獻)이 이조좌랑의 추천을 받았으나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 명이 침입하자 계교로써 적을 물리쳤다. 이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 한 명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605년에 풀려나 이듬해에 성주․홍주의 외직을 차례로 맡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 승지, 판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직언하다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으나 곧 참판에 오르고,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상소를 포기하고 스스로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며칠 뒤에 조정에 나와 강화도에 위리안치시키기로 한 광해군을 전날에 북면(北面)한 군주이므로 곡송(哭送)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위로부터 크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반정 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 원자사부를 겸하는 중책이 맡겨져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기고,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하였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으니,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政)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하여졌는데 이 안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그였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로 승진되고 환도 후에 다시 정헌대부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 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저서로는 『근사록석의』와 『수몽집』이 있다.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엽의 시문집으로 『수몽집』이 전해지는데, 8권 2책 목판본으로 사위 나만갑(羅萬甲)이 수집하고 1669년(현종 10년)에 아들 성두(星斗)가 간행하였다.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시는 오언단률, 오언고시, 칠언절구, 칠언율시 등 형식이 다양한데 칠언절구와 칠언율시가 많다. 봉사(封事)는 대부분 사직(辭職)에 관한 것이나 만언소(萬言疏)에서는 교육․과거․부세제도 및 붕당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 시정방안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다. 차(箚)의 옥당차(玉堂箚)는 임진왜란 후에 민생이 피폐해졌음을 지적하고 언로(言路)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경비를 절감할 것 등을 건의한 내용이다. 계사는 인성군(仁城君)과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및 인조반정과 관련하여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서독(書牘)은 김장생(金長生)․최명길(崔明吉) 등 당대의 명유에게 보낸 것으로 사단칠정, 이기론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국내 상황과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기의 정치적 동향을 연구하는데 참고 자료가 된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도서,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이 중 규장각본은 필사본으로 1925년에 등사된 것이다.

『근사록석의』는 정엽이 찬술한 근사록의 주석서로 14권 4책 목판본이다. 정엽은 김장생이 시작한 근사록석의 작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본문과 주석을 구분하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현종 2년)에 간행한 것이 현존하는 판본이다. 권두에 김장생과 송시열의 서문이 있다. 서술방식은 원문의 구절은 큰 글자로 쓰고 주석은 작은 글자로 하여 축조주석(逐條註釋)한 것이 특징이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억광릉송오(憶廣陵松梧) : 광릉에 있는 친산(親山)의 벌송과 오동나무를 생각하다.

 

                                                                                                                               - 정엽(鄭曄) -

 

早歲斑衣憶鯉趨(조세반의억리추) : 어린 나이 때 색동옷 입고 어버이 뜰 앞을 달렸는데

中宵啼血似雛烏(중소제혈사추오) : 이제는 밤중이면 새끼 가마귀처럼 피눈물 흘리며 운다

悲風樹色鍾山路(비풍수색종산로) : 슬픈 바람에 나무의 빛을 보는 종산(鍾山)의 길이오

明月灘聲杜美湖(명월탄성두미호) : 밝은 달 아래 여울소리 나는 두미호(杜美湖)여!

千里夢魂尋若斧(천리몽혼심약부) : 천리 길에 꿈결은 도끼 모양의 묘소를 찾아가고

一年香火寄胡奴(일년향화기호노) : 일년에 한번 올린 제사는 종에게 맡겨 놨다

爲言樵子休輕伐(위언초자휴경벌) : 일르노니 나무꾼들 벌송을 함부로 베지 말라

手植如今有老梧(수식여금유노오) : 손수 심은 늙은 오동이 지금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