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숙영(任叔英)
1576년(선조 9년)~1623년(인조 1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菴), 감역 기(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 1601년(선조 34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이론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여 동료들이 경원하였다. 전후 유소문(儒疏文)은 대부분 그가 썼다.
1611년(광해군 3년) 별시 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심사의 간쟁과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의 무마로 다시 급제되었다.
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고향인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에 등용되고 사관을 겸하였다. 이어 홍문관정자, 박사, 부수찬, 검토관, 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을 역임,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지평(持平)이 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경사(經史)에 밝았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사후에 부제학에 추종되고 광주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소암집(疎菴集)이 있다.
촌거즉사(村居卽事) : 마을에 있으면서 있는 일.
- 임숙영(任叔英) -
山影沈溪一徑斜(산영침계일경사) : 산 그림자가 시내에 잠겼고 길 하나가 비꼈으며
樹陰當戶兩三家(수음당호양삼가) : 나무 그늘 문에 비친 둘 셋의 집
村童作伴騎黃犢(촌동작반기황독) : 마을 아이가 동반하여 노랑 송아지를 타고
走踏陽坡野草花(주답양파야초화) : 달리면서 양지언덕의 들풀과 꽃을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