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9년(명종 14년)~1636년(인조 14년) 오윤겸의 자는 여익(汝益)이고,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이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의 아들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오윤겸은 152년(선조 15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하여 영릉참봉, 봉선전참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하였다가 홍문관 부수찬, 이조좌랑 지제교,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여 있던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 간 안주목사, 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하였으며, 북도순안어사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한편으로는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하여 그 제례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를 마련 법식을 제정하여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겸쇄환사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북인들에 의하여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에 불참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하여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봉행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여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있어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에 해당됨으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부묘반대론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명성을 얻었고,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년 동안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연해공물의 작미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함으로써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그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며,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척의가 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1663년(현종 4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에 안장하고, 강동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집』을 비롯하여 『동사일록』, 『해사조천일록』 등이 전하고 있다.

 

 광진정사우음(廣津亭舍偶吟) : 광진정사에서 우연히 읊다.

 

                                                                        - 오윤겸(吳允謙)의 시 -

 

手把淵明集(수파연명집) : 손에 도연명의 문집을 들고서

呼兒掃樹陰(호아소수음) : 자식을 불러 나무 그늘 밑을 쓸게 하였다

江流靑不盡(강류청불진) : 강의 흐름은 푸르러 한이 없고

雲出白無心(운출백무심) : 구름은 솟는데 하얗고 무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