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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연산군 5년)~1572년(선조 5년) 이준경의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이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그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의 아들로 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이준경은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그해 말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 직제학,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 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 우윤,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년)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년)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儒)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 鈞)을 왕으로 받드니 이가 바로 선조이며,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 년 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慎)․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朝鮮風俗)』등이 있다.

 

명묘만사(明廟挽詞) : 명종(明宗)의 만사

                                                   

                                                         - 이준경(李浚慶) -

 

半夜催宣召(반야최서소) : 한밤중에 급히 부르신다기에

蒼黃寢殿升(창황침전승) : 창황하게 침전엘 올랐더니

龍顔纔及覩(용안재급도) : 용안을 겨우 뵈었을 뿐

玉几己難憑(옥궤기난빙) : 옥궤는 이미 기대실 수 없게 되셨네

聖嗣由前定(성사유전정) : 聖嗣는 기왕에 정한대로 하였으니

宗枋遂有承(종방수유승) : 종묘를 이를 수 있게 되었네

三朝猶未死(삼조유미사) : 三朝를 섬기면서 죽지를 않고

忽見禍相仍(홀견화상잉) : 재앙이 잇다음을 차마 보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