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8년(명종 3년)~1622년(광해군 14년) 심희수의 자는 백구(伯懼)이고,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정자(正字) 심건(沈鍵)의 아들이고,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종제이고, 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다.

심희수는 노수신(盧守慎)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고,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하였다. 1589년 헌납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사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여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하니, 그가 중국어를 잘하였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가 되어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구제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는 사명(辭命)을 장악하고 밖으로는 접빈(接賓)에 힘썼다. 좌찬성, 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는 불가함을 말하여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해 가을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승하려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그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7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입상(入相)하였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李爾瞻)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臨海君)을 극형에 처하려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하자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鄭蘊)을 적극 변호하여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산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한강선상(漢江船上) : 한강 배 위에서

             

                                                                                                                - 심희수(沈喜壽) -

 

雷電中天雨斜陽(뇌전중천우사양) : 뇌성 울고 번개 치는 中天에 석양 무렵 비가 내려

篷窓猶覺産微凉(봉창유각산미량) : 돛대 건 창문에 오히려 약간 서늘함이 생긴다.

魚龍出沒風濤壯(어룡출몰풍도장) : 고기와 용이 출몰하고 풍파가 굉장하니

無復雲頭透日光(무부운두투일광) : 다시는 구름 위의 햇빛이 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