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jpg

 

1420년(세종 21년)~1488년(성종 19년) 서거정의 초자는 자원(子元)이고, 자는 강중(剛中)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달성이며, 증조부는 호조전서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서미성(徐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그리고 최항(崔恒)이 그의 자형이다.

서거정은 6살에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신동(神童)이라 불리었다. 같은 신동이라 부르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는 동시대를 살면서 가는 길이 서로 달랐다. 그는 4번이나 현과(賢科)에 합격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대사헌을 2번, 조정에 봉사한 것이 45년, 과거시험관을 23번이나 지내었다.

그는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지리․의약․복서․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 박사, 경연사경이 되고, 1447년 부수찬으로 지제교 겸세자우정자로 승진하였으며, 1451년(문종 1년) 부교리에 올랐다. 다음해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 세자우필선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의 「적벽부」글자를 모아서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하여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사간 지제교에 초수되었다. 1458년 정시에서 우등하여 공조참의 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오행총괄』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을 만나 시재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65년에 예문관 제학, 중추부동지사를 거쳐 다음해 발영시에 합격하여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등준시에 3등으로 합격하여 행동지중추부사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찬수에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 성균관지사를 겸하여 문형(文衡)을 관장하였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년)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여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하여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하였는데, 수창(酬唱)을 잘하여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를 공편하였으며, 1477년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을 겸하였다. 다음해 대제학을 겸직하였고, 곧이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동문선』130권을 신찬하였으며,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오자(吳子)』를 주석하고,『역대연표』를 찬진하였다. 1481년『신찬동국여지승람』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를 겸하였으며, 이 해『동국통감』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를 저술하여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논어』를 강하였으며, 다음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 23년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다.

그의 저술로는『사가집(사가집)』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는『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가 있고, 개인 저술로는『역대연표』,『동인시화』,『태평한화골계전』,『필원잡기』,『동인시문』등이 있다.

조선초기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하였던 핵심적인 학자의 한 사람으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동문선』을 편찬하였으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을 내세우고 있다.『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이 조국(肇國)하고, 기자가 수봉한 이래로 삼국 ․ 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자랑하고 있다.『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적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의『방여승람』이나『대명일통지』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의 지리서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하여 편찬된 사서․지리서․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의해서 사림의 참여하에 개찬되었다. 그런데, 그가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초기 세종에서 성종 대까지 문병을 장학하였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전도도중(三田渡道中) : 삼전도 가는 도중에

                                                                       

                                                                               - 서거정(徐居正) -

 

羸馬三田渡(리마삼전도) : 파리한 말 가는 삼전도에

西風吹帽斜(서풍취모사) : 서풍이 불어 모자가 기울어졌다

澄江涵去雁(징강함거안) : 맑은 강에는 가는 기러기 모습 담겨져 있고

落日送還鴉(낙일송환아) : 지는 해는 돌아오는 갈가마귀를 보내준다

古樹明黃葉(고수명황엽) : 늙은 나무에는 단풍잎 환하고

孤村見白沙(고촌견백사) : 외로운 마을엔 하얀 모래밭 보인다

靑山將盡處(청산장진처) : 청산이 다 되어 가는 곳에

遙認是吾家(요인시오가) : 멀리 우리 집이 보이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