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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효첨(魚孝瞻) 1405년(태종 5년)~1475년(성종 6년) 조선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만종(萬從), 호는 구천(龜川), 집현전직제학 변갑(變甲)의 아들, 직제학 성사제(成思齊)의 외손, 좌의정 박은(朴訔)의 사위이다.

1423년(세종 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9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선임되고, 이어 대교가 되어 기사관으로서《태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동궁일 때 선발되어 좌정자, 좌우사경문학을 거쳐 1443년 집현전교리가 되어 서연관으로 문명을 날렸다. 1446년 집현전응교, 1449년 직집현전을 역임하고, 예법, 공법(貢法),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고려사》의 체재를 기(紀), 전(傳), 표(表), 지(志)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1449년 사헌부집의가 되어 불교와 음사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부중(府中)에 있는 음사를 훼철하였다.

1453년(단종 1년) 판내자시사에 오르고, 전라도를 안찰하여 폐정을 바로잡았으며, 이듬해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 당시 당대의 실권자인 수양대군이 주장하는 납비(納妃) 문제를 극력 반대하고, 1455년(세조 1년) 세조가 왕권강화를 꾀하기 위하여 의정부의의제(議政府擬議制)를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변경할 때 하위지(河緯地), 이예장(李禮長)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는 등 세조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 의금부제조를 겸하여 이른바 사육신사건을 다스리면서 점차 중용되었다.

그 뒤 호조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458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중추원부사, 한성부윤, 형조참판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고, 1463년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가을 지중추원사로 옮기고, 1467년 영중추부사, 1468년(예종 즉위년) 동지중추부사, 1474년(성종 5년)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의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문명을 드날리고, 성리학 특히 예학(禮學)에 깊어 세종 말년에는 집현전교리로서 서연관을 겸할 때 세자에게《예기》를 강하기 위하여 <예기>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중요 학설을 발췌하여 주석을 단 《예기일초(禮記日抄)》를 지었다. 또한 예법을 존중하여 풍수지리설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세종조 후반에『자치통감훈의』와 『고려사』의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큰아들 세겸(世謙)은 좌의정을, 둘째아들 세공(世恭)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제함종척서루(題咸從滌暑樓) : 함종의 척서루에 쓰다.

 

                                                                                               - 어효첨(魚孝瞻) -

 

牙善城高邑勢雄(아선성고읍세웅):아선성이 높아 읍의 형세 웅장하고

吾鄕從古有淳風(오향종고유순풍):우리 고을은 예로부터 순박한 풍속이 있다.

況今民被穎川化(황금민피영천화):하물며 이제 백성들이 영천(穎川)의 덕화를 입어

坐見農桑歲歲豊(좌견농상세세풍):농사 길삼이 해마다 풍년들믈 그대로 보겠음이랴.

衣錦還鄕獨倚樓(의금환향독의루):금의 입고 고향에 돌아와 홀로 누각에 기대어 섰으니

寄觀滿眼興難收(기관만안흥난수):기이한 구경거리 눈에 가득하여 흥치를 거두기 어렵다

吏民父老爭相迓(이민부노쟁상아):관료와 백성과 부노(父老)들이 앞 다투어 맞아주니

醉裏都忘客裏愁(취이도망객이수):취한 중에 객중이 시름을 모두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