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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0년(공민왕 9년)~1410년(태종 10년)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승경(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鄭地), 이림(李琳), 왕안덕(王安德), 우인열(禹仁烈), 우홍수(禹洪壽) 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추지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이 해에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 그 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 좌산기상시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 예문관제학, 동북면도순문사, 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도사 겸 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 4년)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6년에 계림부윤, 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吏治)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년)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 시호는 정평(定平)이다.

묘가 고덕중학교 운동장 부근에 있었는데, 고덕지구택지조성사업으로 인하여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 산105번지로 이장하였다.

 

                                  경운루(慶雲樓)

                                                                     함부림(咸傅霖)

 

雪盡泉聲細(설진천성세) : 눈이 다 함에 물소리 가늘게 나고

煙銷樹影回(연소수영회) : 연기가 잠기니 나무 그림자 돈다

樓高膚起粟(누고부기속) : 누각이 높으니 살이 오싹하고

屋古瓦對苔(옥고와대태) : 집이 낡아서 기와에 이끼가 끼었다

白日依山靜(백일의산정) : 백일(白日)은 산을 의지하여 고요하고

淸風動地來(청풍동지래) : 청풍(淸風)은 땅을 흔들며 온다

憑欄千萬意(빙난천만의) : 난간에 기대어 천만가지 생각이 나는데

臨事不知栽(임사불지재) : 일을 임하여는 결단할 줄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