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朴訔)
1370년(공민왕 19년)~1422년(세종 4년) 박은의 자는 앙지(仰之)이고, 호는 조은(釣隱)이며,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 박상충(朴尙衷)의 아들이며, 이곡(李穀)의 외손으로 전법판서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魚孝瞻)의 장인이다.
박은은 1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음(門蔭)으로 판숭복도감사를 받은 뒤, 1385년(우왕 11년) 문과에 2위로 급제하여 권지전교시교감, 후덕부승을 거쳐 1391년(공양왕 3년)에 통례문부사, 이듬해에 개성부소윤이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고과(考課)에 정최(政最)의 성적으로 좌보궐에 서용되고, 1394년(태조 3년) 지영주사로 있을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게 되어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으며, 겸판의용순금사사가 되어 옥무(獄務)의 신장정수(訊杖定數)를 1차 30인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고,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考功) 행정제도를 개선하였다. 이듬해에는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의 예에 들게 되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沈溫)과 대립되어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되는 입장에서 관여하였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講經)을 채택하도록 강경히 주장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니, 초시에 제술(製述)을 주장하는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의 학통과 다르다.
박은이 강동 지역에 묻힌 것은 부친 박상충의 매부인 광주 안길상의 연고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