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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중은 고려조 말기의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우참의에 올랐으며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서견(徐甄), 이방원(李芳遠 : 太宗)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을 하려고 매일같이 회의를 하였다. 이때 이양중은 극히 간하기를 지금 국내정세가 대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소장지변이 생길까 염려이니 요동을 침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때 조민수(曺敏修)가 대신들과 음모하여 이양중을 헐뜯어 먼 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태조 혁명 초에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왔다가 바로 광주 남한산에 들어가서 모든 인사를 끊고 고죽부(孤竹賦)와 경송시(勍松詩)를 지으니, 그 글 뜻이 매우 강개울분하여 보는 사람이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하루는 이색이 귀양이 풀려서 적소로부터 밤에 이양중의 집으로 왔다. 서견은 이미 와 있거늘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되, 국사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우리가 동시에 사직하고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어 이런 변을 안 볼 것을 하고 길재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 무렵 태조가 이양중을 불러 벼슬을 주어 받지 않으면 치죄하리라하니 이천우(李天祐) 등이 태조에게 말하되 이양중은 고려조 때 수절대신이요 고집이 대단하니 벼슬로도 달랠 수 없고 죽여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에게 한성판윤을 주어도 받지 않으므로 친히 남한산아래 돌여울에 와서 만나 보았다. 이양중은 평복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배알하고 술과 안주를 드렸다. 태종은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여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漢)나라 왕도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는가?” 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오.”하고 인하여 길재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였다. 신하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큽니다,”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맞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였다.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냈다. 그 글 뜻은 ‘술 석 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천년(富春山千年)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로다.’

태종은 즉시 이양중의 큰아들 우생(遇生)에게 사온주부(司醞主簿)를 특배하였다.

동생 이양몽(李養蒙)은 벼슬이 형조판서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항절신으로 관직을 버리고 남한산아래 수리골(현 하남시)로 은거하였다가 태종이 이양중을 찾아오자 원적산으로 피신하였다.

이양중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묘는 수리골에서 광주시 초월면 무갑산으로 1989년에 이장하였다. 고덕재(高德齋)와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撰)하였다.

 

명(銘)하여 가로되,

 

공(公)의 곧은 지조는 겨울의 송백과 같고

공(公)의 높은 절의는 태산 교악과 같도다.

주(周)나라 같이 융숭하고 한(漢)나라 같이 창성함에

많은 사람이 붇다트는데 저 멀리 나는 기러기는

어찌할 수 없구나. 성군(聖君)의 도량이 아니였다.

공(公)을 뉘가 이루리.

저 높은 바람 엄자릉과 더불어 만고에 명성 떨치네.

오직 충효로써 자손에게 길이 끼쳐주어 떨어드림이 없도다.